2026 S/S 시즌, 패션위크를 지배한 사운드트랙 6가지
2025.10.07 | by Young Shin패션과 음악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특히 런웨이에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컬렉션의 세계관을 전달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2026 S/S 시즌, 전 세계 패션위크의 런웨이는 그 어느 때보다 ‘소리’로 생동했다. 각 하우스는 고유의 사운드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확장했고, 그 결과 무대는 하나의 음악적 모먼트로 가득 채워졌다.
2026 S/S 시즌, 패션과 음악이 만들어낸 여섯 개의 결정적 순간. 지금, 그 사운드트랙을 함께 살펴보자.
루브르 박물관 내 오스트리아 여왕의 아파트에서 펼쳐진 루이 비통 2026 S/S 쇼는 공간만큼이나 음악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번 무대의 사운드트랙은 프랑스 작곡가 텡기 데스타블(Tanguy Destable)의 오리지널 곡 “Head in the Sky” 위에 배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이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명곡 “This Must Be the Place”의 가사를 낭독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부드럽고 차분한 블란쳇의 목소리로 시작된 쇼는 이번 시즌 주제인 ‘공간’, ‘집’, 그리고 ‘사적인 영역’을 한층 서정적이고 힘 있게 전했다.
루이 비통이 선택한 이 음악적 연출은 극도로 절제된 세트와 조명 속에서 더욱 빛났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은 대리석 벽과 클래식한 샹들리에 아래, 데스타블의 몽환적인 신스 사운드가 울려 퍼지고, 블란쳇의 나직한 낭독이 공간의 숨결처럼 흘렀다. 고전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이 조합은 ‘기억이 깃든 집’이라는 테마를 오감으로 확장시키며, 역사적 공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서사적 사운드 퍼포먼스를 완성했다.
밀라노에서 공개된 베르사체 2026 S/S 컬렉션은 한층 다른 울림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시즌의 음악은 뉴욕 출신 프로듀서 피지컬 테라피(Physical Therapy, 본명 Daniel Fisher)가 직접 맡아, 고유한 전자적 질감과 섬세한 리듬으로 쇼의 공기를 완전히 새로 빚어냈다.
이번 협업은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리오 비탈레(Dario Vitale)의 첫 무대이기도 했다. 도나텔라 베르사체 이후, 1978년 브랜드 창립 이래 처음으로 ‘비(非) 베르사체 가문’ 인사가 지휘봉을 잡은 역사적 순간인것. 피지컬 테라피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비탈레가 초대해주어 영광이었다”며 협업 소감을 남으며 동시에 “이번 쇼의 사운드트랙은 새 시대의 베르사체를 위한 전자적 조각(sonic sculpture)”이라고 설명했다.
피지컬 테라피의 음악은 단순한 일렉트로닉이 아니다. 2010년대 브루클린 클럽 신(Scene)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테크노, 하우스, UK 개러지, 브레이크비트 등 다양한 서브컬처의 리듬을 재조합하는 사운드 실험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본인 레이블 Allergy Season을 통해 rRoxymore, CCL, DJ Python 등 혁신적 사운드메이커들과의 협업을 꾸준히 이어왔으며, 작년에는 10주년 기념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해 전자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또 다른 예명 Car Culture로 ‘Rest Here’라는 새 앨범 발매를 예고하며, 사운드 아트 전반을 넘나드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의 사운드트랙은 이번 베르사체의 새로운 방향성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비탈레가 제시한 미학은 ‘클래식한 글래머를 현대적 에너지로 재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피지컬 테라피의 비트는 유려한 베이스라인과 거칠게 숨쉬는 신스, 그리고 불규칙한 리듬 패턴으로 구성되어, 베르사체의 실크 드레스·메탈릭 셋업·컷아웃 재킷 등 강렬한 실루엣에 묵직한 맥동감을 부여했다.
결국, 이번 베르사체 쇼는 한 세대의 전환점이자 사운드의 혁신이기도 했다. 브랜드의 유산을 덮어버리는 대신 그 표면 위에 새로운 결을 덧입히는 섬세한 작업. 그것이 비탈레가 그리고 피지컬 테라피가 함께 제시한 ‘뉴 글래머(New Glamour)’의 사운드였다.
2026 S/S 파리 패션위크에서 가장 많은 기대를 모은 쇼 중 하나는 단연 글렌 마틴스(Glenn Martens)의 메종 마르지엘라 첫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이었다.
7월 쿠튀르기간, 아르티저널(Artisanal) 라인에서의 강렬한 데뷔로 이미 주목받은 그는 이번엔 ‘순수함과 해체의 공존’을 주제로, 브랜드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리고 그 무대의 중심에는 예상 밖의 존재들이 있었다 — 바로 아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런웨이 초대장은 ‘리코더(recorder)’였다. 마틴스가 남긴 이 작은 단서는 곧 무대 위에서 현실이 된다. 쇼가 시작되자, 거대한 오버사이즈 수트를 입은 어린 연주자들이 등장해 오케스트라를 이루고, 리코더와 현악기, 심지어 작은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음이 흔들리고, 리듬이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메종 마르지엘라의 언어였다.
이번 쇼는 1989년, 마르탱 마르지엘라 본인이 파리 외곽의 놀이터에서 모델들에게 어린이를 안고 걷게 했던 전설적 ‘키즈 쇼’의 직접적 오마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틴스의 방식은 단순한 복기가 아니라, 과거의 ‘순수함’을 오늘의 불안 속으로 소환하는 시도였다.
공간을 가득 메운 리코더의 호흡, 어린이들의 천진한 박자,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미묘한 불협화음은 이번 시즌의 메시지 — “완벽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아름다움” — 과 정교하게 맞물렸다.
조니 요한슨(Jonny Johansson)이 이끄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는 이번 시즌,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며 다층적인 자아와 감정의 스펙트럼을 탐구했다. 런웨이 음악의 중심에는 스웨덴 팝 아이콘 로빈(Robyn)이 있었다. 그녀는 이번 쇼의 사운드를 직접 큐레이션하며, 아크네의 실험적 세계관에 감각적인 서사를 입혔다.
로빈은 이 쇼를 통해 7년 만에 공개하는 신보의 단서를 남겼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 곡들을 재해석하고, 미발표 신곡을 섞어 하나의 ‘음악적 콜라주’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받은 것은 2005년 발표한 “Robotboy”의 새 버전 —스웨덴 래퍼 융 린(Yung Lean)과 함께 재녹음한 트랙이었다.
무대에 흐른 사운드는 그녀 특유의 몽환적 보컬과 미니멀한 신스 라인이 교차하며, 현대적인 낭만과 불안을 동시에 담아냈다. 심장 박동 같은 리듬은 쇼장의 분위기를 한층 더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사운드트랙 후반부에는 로빈의 미발표 신곡과 그녀의 2005년 곡 “Should Have Known”을 재편곡한 버전이 포함되었다. 원곡의 멜로디에 더해진 새로운 가사 — “Fuck an app, I need me some IRL” — 은 디지털 세대의 피로감과 진짜 관계에 대한 갈망을 날것 그대로 담아, 이번 쇼의 주제인 ‘감정의 실체를 드러내는 옷’과 맞닿았다.
밀라노의 파브리카 오로비아(Fabbrica Orobia), 한때 아연 공장이었던 이 거친 산업 공간이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의 첫 번째 새로운 막을 여는 무대가 되었다.
이번 시즌은 영국 출신 디자이너 루이즈 트로터(Louise Trotter)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데뷔작으로,
하우스의 전통적 장인정신과 현대적 감수성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이 감정의 전환점을 완성한 건 다름 아닌 영화감독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었다.
그는 이번 쇼를 위해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니나 시몬(Nina Simone)의 보컬을 엮은 사운드 피스 ‘66–76’을 직접 제작했다. 이 제목은 두 거장의 대표곡 “Wild Is the Wind”이 각각 녹음된 해를 의미하며, 두 버전이 가진 시대적 정서의 간극을 예술적으로 포개놓았다.
켄싱턴 팰리스 가든스(Kensington Palace Gardens) 한가운데서 울려 퍼진 기타 리프와 묵직한 드럼 비트. 런던 패션위크의 마지막 밤을 장식한 버버리(Burberry)의 2026 S/S 쇼는 그 시작부터 한 편의 브리티시 록 페스티벌을 연상시켰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리(Daniel Lee)는 패션과 음악의 연결고리에서 영감을 받아 하우스 고유의 클래식함 위에 ‘록앤롤의 황금기’라 불리던 1970년대의 감성을 과감히 덧입혔다.
이번 컬렉션의 사운드트랙은 전설적인 밴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음악으로 구성되었다.
리프와 드럼이 교차하는 메들리 형식의 사운드는 다니엘 리가 선보인 새로운 시즌의 레디투웨어 컬렉션에 강렬한 에너지를 더했다.다니엘 리는 이번 시즌을 통해 버버리의 영국적 정체성을 다시금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록앤롤이 상징하는 자유와 저항, 개성과 혼란의 에너지가 그가 표현하고자 한 “리얼 브리티시(Real British)”의 정신을 대변하듯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