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가 말하지 못했던 것들: K팝, 아티스트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2026.09.15 | by 류승규 | ryumix@billboard.co.kr
지난 9월 11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 로이 톰슨홀.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TIFF) 레드카펫에 선 리사를 향해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이날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다큐멘터리 '올웨이즈 라리사(Always Lalisa)'는 블랙핑크를 떠나 홀로서기에 나선 리사의 1년을 담은 수 킴(Sue Kim) 감독의 작품이다. 그러나 화려한 레드카펫 뒤로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스포트라이트만은 아니었다.
영화가 공개한 한 장면은 짧지만 무거웠다. 연습생 시절 영상 유출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을 때, 리사와 현 소속사 LLOUD는 공식 입장을 내고자 했지만 전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것이다. 리사는 자신이 태국에서 갓 건너온 연습생이었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다는 맥락을 직접 설명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설명은 YG의 판단 아래 공개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묻혀 있었다.
이 에피소드가 흥미로운 지점은 인종차별 표현 그 자체의 파장을 넘어, '아티스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를 누가 쥐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리사 개인의 사례로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대형 기획사와 소속 아티스트 간의 '소통 간극'이다. 리사의 사례처럼, 투명한 소통으로 즉각적인 사과를 전하려는 아티스트의 입장과 파장을 고려해 보수적 접근을 택하는 기획사의 방향성은 종종 충돌한다. 이는 리스크를 바라보는 양측의 근본적인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엇박자와 적기를 놓친 침묵은 결국 이미지 타격으로 되돌아온다.
실제 YG엔터테인먼트에서 소속 아티스트들의 언론 홍보를 맡았던 업계 관계자는 빌보드코리아에 “아티스트의 사생활 이슈를 처리하는 과정이야말로 한 기획사의 위기관리 수준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지표”라고 짚었다. 콘텐츠 제작에는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투입하면서도 정작 아직 벌어지지 않은 위기에 대한 대비에는 소홀한 기획사가 많다는 지적이다. 그 결과 사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뒤에야 뒤늦은 수습에 나서는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 얼마나 내부 소통이 원활한지, 팬심을 이해하는지, 위기 국면에서 메시지를 쓸 역량이 있는지가 "완성형 매니지먼트의 첫 출발"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이 진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사의 경우 소속사가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리스크가 아니라, 아티스트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 했던 리스크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아이러니하다. 위기가 감지됐고 당사자가 대응 의지까지 밝혔음에도, 정작 그 판단은 회사의 몫으로 넘어갔다.
리사-YG 사례가 특히 시사하는 바는, 이런 소통 이슈가 대형 기획사와 글로벌 K팝 아이돌 사이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YG는 업계 최상위 대형 기획사 중 하나다. 그럼에도 위기관리 판단은 철저히 회사 중심으로 이뤄졌고, 아티스트 본인의 서사적 필요는 부차적으로 취급됐다. 모든 사례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K팝 산업 특성상 대형 기획사의 선례를 중소 기획사들도 참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그 파장은 작지 않다.
결국 리스크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미리 감지했든 못했든, 그 위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한 기획사의 진짜 역량을 보여준다. 콘텐츠에 쏟는 만큼의 공을 소통과 위기 대응에도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매니지먼트가 갖춰야 할 기본기일 것이다. 자신에게 벌어진 논란에 대해 스스로 설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티스트가 K팝 산업에 얼마나 더 있을까. 무대가 넓어질수록, 그리고 K팝의 글로벌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질문은 리사 한 사람만의 문제로 남지 않을 것이다.